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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6일 금요일

2007년 7월 10일 인디안밥 인터뷰

인디 뮤지션 연합전선의 기수, 한받을 인터뷰하다.



  한받(아마츄어증폭기, 스트레칭 져니) 인터뷰

 우 리의 만남은 나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우연히 들어갔던 그의 블로그에서, 그가 끼적여 놓은 ‘홍대 인디씬 연구’라는 카테고리를 발견했고, 거기 있는 글들을 내 맘대로 해석해버린 것이다. 나는 그가 홍대 인디씬 자본의 흐름이 기형적이라는 것을 인식하여, 이러한 현실을 전복시킬 대안을 모색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분히 투쟁적인 그의 문체는 나를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그는 나에게, 홍대 인디씬에서의 자본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되었고, 이 인터뷰의 첫 대전 상대가 되었다.

 만 나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나는 그를 오해한 것이었다. 그는 상처받고 희망이 꺾인 한 마리 수줍은 고등어 같았고, 대안은커녕 지금의 현실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만을 조그맣게 펼쳤다. 그러나 묻고, 묻고 다시 물었을 때 그는 결국 숨겨가지고 있던 희망을 드러내어 주었다. 그의 단상들은 앞뒤가 맞지 않았고, 나는 뒤섞인 그 것들을 정렬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혔다. 나는 다그쳤고 -지면에 싣지 않은 수많은 대화들이 있었음을 밝힌다.- , 그는 실토했다. 나는 승리한 것 같은 기분에 도취되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이틀 뒤, 나는 나의 공격적인 성향에 대해 사과했고, 그는 자신의 중구남방인 이론을 반성했다. 인터뷰 장소였던 홍대 근처 어느 콩나물국밥집의 적적한 분위기가 나를 더욱 전투적으로 만들었을까.


1. 연합전선

홍대 인디씬 연구 관심 있게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일 단 그때 제가 쉬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많았어요. (웃음) 엄청 많은 시간과 노력, 열정을 투자해서 노래를 만들고 공연을 하고 있는데, 이 노력들이 그냥 잊혀져버리면 안되겠다. 기록해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시작하게 된 거죠.


글들을 읽으면서, 한받씨는 인디음악으로 돈을 벌어 살고 싶어 한다. 그 방법을 모색 중이다. 라고 느껴서 인터뷰를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진척이 좀 있었나요? 제가 그런 생각을 가졌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이상적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지금 제 생활만 봐도 다른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기 떄문에...


그럼 이상적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욕망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이신가요? 욕망이 있으니까 그렇게 연구를 진행하시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해 결방식이나 이런 것을 찾으려고 한건 아니고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들을 적었어요. 한받이란 인간이 여기(홍대 인디씬)서 겪었던 경험들을 올린 거죠. 어떤 대안을 제시한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게 실마리가 되어서 연리목씨 같은 분들이 한 단계 넘어주셨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은 드네요.


그럼 제가 오해를 한 거군요. 인터뷰 주제가 독립예술가로 살아남기라서 모신 건데 이거 큰일 났네요 (웃음) 아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하고 있는 건 있어요. 무기획, 무홍보, 무원칙을 원칙으로 하는 연합전선을 구축하자는 거죠. 연합전선이요? 무엇을 위한, 어떤 연합전선인가요? 저는 이게 하나의 전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제국주의와 거대 미디어와의 전쟁이요. 그래서 모든 장르의 음악가들이 너무 취향에 집착하지 말고 뭉쳐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보통은 어떻게 하면 미디어를 잘 이용해서 인디씬이 대중에게 더 잘 드러나게 할까를 고민할 것 같은데요, 전쟁이라 말씀하시다니 의외입니다. 미 디어를 이용하려는 시도는 지금까지 계속 실패해왔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영국의 펑크를 보면, 이용하려다 도리어 이용당한 경우거든요. 펑크라는 것은 노동자 계급의 의사를 놀이라는 방법을 이용해서 전달하고자 했던 건데, 그게 미디어로 넘어가면서 결국 노동자계급을 위한 게 아니고 어린이라든지, 중산층에 소비가 되면서 이용당하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죠. 미디어에 뛰어들었을 때는 어떤 혁명의 기운이 있어서 뛰어든 것인데, 결국은 그렇게 되어버렸지요.


네, 그래서 전쟁을 택하셨군요. 그런데 전쟁이란 치밀한 기획과 원칙이 있어야 승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무기획, 무홍보, 무원칙의 원칙으로 공연을 한다면 잘 될 리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요.하 하 제가 블로그에 올리는 것들이 다 그런 겁니다. 어찌 보면 말장난일수도 있는 거죠. (웃음) 무기획, 무홍보, 무원칙이라는 것은 제가 견지하고 있는 도덕 떄문인 것 같아요. 틀이 만들어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요. 그리고 끈질긴 하나의 저항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클럽들은 각자 견지하고 있는 자세 즉 원칙들이 있어서, 음악가들이 클럽주들의 지휘 아래 많이 얽매여 있거든요. 거기서 돈을 벌지도 못하면서 말이죠. 그게 클럽들의 생존전략이지 않습니까? 클럽마다의 개성을 특화시키는 것. 관광 상품처럼 말이죠. 네. 빵 사장님의 색깔론이 바로 그런 거죠. 근데 빵은 좀 폐쇄적인 게 있습니다. 그게 안타깝기도 하고. 근데 저도 폐쇄적이에요. 취향에 많이 목매는 편이고. (웃음)


그런데 취향을 경계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어차피 음악을 창작하거나 소비하려면 취향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런 자연스러운 고집을 배척하는 것이 오히려 강압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저 는 미국의 가치관이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너무 마구잡이로 전도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유교문화가 좋았다 그런 건 아니고, 개인주의에 너무 빠져있다는 겁니다. 자기 취향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거죠. 자기 취향을 맹신하게 되면 그 쪽으로만 빠지게 되거든요. 고인 물처럼. 개인주의가 물을 고이게 하는 기반인 것이고요. 흔히 말하는 홍대 문화, 젊음. 그런 것을 깨야 되지 않나 싶어요. ‘매니아적으로 가지 말자’ 그런 거죠.


그럼 다시 연합전선으로 돌아가서, 만약 취향을 타파한 연합전선이 꾸려진다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거죠? 제 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일단 음악가들이 주체가 되어서, 너무 고집피우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연합해서, 우리 자신이 공연한 수익이 본인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클럽은 공연수익이 클럽의 운영비로 쓰이잖아요. 거기서 돈을 받아갈 수는 없는 입장이라는 거죠. 사실 알고 보면 클럽의 운영이 클럽주인만 하는 게 아닌 거예요. 클럽주인, 음악가, 관객 이 세 주체가 같이 이 씬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 우리가 클럽에서 돈을 받을 형편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럼 연합전선을 구축하면 수익이 생길 수 있다는 건가요? 어떤 식의 공연을 생각하고 계신건지 궁금하네요. 연합전선 나름의 어떤 야외, 특정한 공간이 아닐 수도 있고요. 일단 무기획이기 때문에 세밀한 계획은 없습니다. (웃음) 거기서 수익이 나면 가져가는 것이고.. 그 런데 일단 요즘은 사람들이 음악 공연을 별로 보러오지 않는다는 시대적인 문제도 있잖습니까? 대중매체나 mp3다운로드 등을 통해서 음악을 접하기 너무 쉬워졌기도 하고, 워낙 시청각적인 자극을 많이 받고 사는 세대라 인디 뮤지션들의 음악 공연은 별 재미를 주지 못하는 것 같아요. 밴드들이 연합한다고 해서 많이 보러올 것 같지도 않고요. 공 연 안 보러 오겠다는데 그걸 어떻게 합니까. 삐라를 돌릴 수도 없고. 연합전선 측에서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은 관계가 없어요. 흥행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하고 있는 거죠. 저는 자본주의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흥행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지고 있어요. 흥행을 안 하면 직업으로 삼을 수가 없지요. 여기서 음악 하는 사람들을 보면요. 좀 웃긴 말이지만 신선들 같아요. 금전적으로 얽매어있지 않고, 어렵게 힘들게 사는데도 공연이나 음악에 대해서 애정을 막 바치죠. 정말 밤새도록 만들기도 하고. 그런 분들을 몇몇 봤기 때문에. 이런 말도 좀 웃기지만 덜 타락했구나. 이 씬이 계속 이대로 갔으면 좋겠다. 자본의 개입이나 스포트라이트를 안 받고. 자기 생명을 유지할 정도로만 노동으로 돈을 벌고 음악으로 나머지 타락한 사람들에게 치유의 빛을 던져주는. 어떤 동정, 기부의 행위가 아닐까.


흥행에 대해 생각을 안 하신다고요? (아니 그런 폭탄선언을! 이 발언은 이날 두고두고 공격당하게 된다.) 네. 그러니 이렇게 되면 이걸 직업으로 삼고 갈 수 있느냐 문제가 되는데 지금 상황에서 이걸 직업으로 하는 건 굶어 죽을 수 있다고 봅니다. 노동을 해야 된다는 거죠 뮤지션도. 어떤 육체적인 노동을 통해서 자기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는. 


(또 돌발발언 등장) 노동에 대해서 쓰신 글 본 것 기억나요. 그런데 그 노동이 그 노동이었나요? 전 음악을 다른 노동자처럼 해야 한다. 라고 쓴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그러다가는 죽을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웃음)


2. 한받


인터뷰 주제가 독립예술가로 살아남기입니다. 독립예술가로서 살기가 어떤가요? 전 그 단어에서 항상 빨간불이 들어오는데요, 예술가라고 하는 말에 반감이 들어요. 항상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확실히 뭘 해도 예술가가 아닌 걸로 회귀를 했던 적이 있는데 거기서 자만심을 가졌던 것 같아요. 거기서 더 할 수 있다 하고 더 뻗어나갔는데 2004년 정도가 진짜 좋았어요. 예술가인 것 아니고 진짜 재미있는 음악가로써. 근데 지금은 남들이 예술가라고 하고 그렇다는 걸 느껴요. 예술이라는 것에 많이 거부감이 있습니다.


그러면 인디음악인 이라는 표현은 괜찮을까요?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로써 인디씬, 인디 음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90 년대 중반에 인디씬? 펑크씬이 뭔가 좀 흥했잖아요. 그거는 제가 볼 때 좀 놀았던 거죠. 진정한 인디씬은 지금도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어떤 아집이나 똥고집 같은 걸 가지고, 계속 저항하고 있다. 그런데 왜 지금 90년대처럼 잘되지 않은가 라고 문제제기를 하잖아요? 그건 문제를 잘못 짚은 것 같아요. 자꾸 과거로 눈을 돌리는 거고. 그 상황에 대한 분석도 안 되어있는 상태고. 거기에 대한 구름만 덕지덕지 붙어있죠. 그걸 계속 선망하면서 갈 수는 없는 거죠.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계속 무보수로 공연을 하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지만 돌아오는 건 왜 허탈함뿐인가. 그런 고민을 하면서도 이 씬을 계속 이어져나가게 하고 있다. 그러면 패배감이 아니라 어떤 자부심을 느껴야 되는데 자꾸 과거로 가면서 왜 우리는 안 되는가 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왜 굳이 모든 사람이 내 음악을 들어야하나 라고 쓴 글을 본 기억이 납니다. 물론 자기만족을 위해 창작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보통은 보여주고 싶고, 들려주고 싶은 욕구가 있어서 만드는 것 아닌가요? 특히 아마츄어증폭기 같이 공연을 많이 하고 앨범도 여러 장 낸 밴드라면 더 더욱 그러한 욕구가 큰 것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어째 그 점에 대해 부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 그랬죠. 좀 모순된 감정들이 왔다갔다 하나봅니다.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근데 너무 많이 보면 싫고...아마쥬어증폭기의 소년중앙(작년에 발매한 앨범)의 경우 판매가 너무 소극적이었나요? 현재 아예 생산을 중단했습니다. 앨범 내면 막 홍보를 많이 하잖아요. 저는 그런 걸 안했거든요. 앨범을 자체 제작해서 팔아봤는데 본전 나오더라고요. 거기서 돈을 못 벌겠더라고요.


그런데 ‘사려면 이쪽을 통해 사라’ 그런 글도 올리셨죠. (그는 이즘이라는 웹진 게시판 한군데에 홍보 글을 올렸다.) 이라는 나름의 홍보를 하신 거잖아요. 팔려고. 근데 기왕 팔 거면 왜 딱 한군데만 홍보를 하셨나요? 예를 들어 공연을 했는데 100명 정도 왔다, 그러면 싫어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주니까. 좀 이상한가.


많 은 사람들이 좋아해주니까 싫은 게 아니고, 어중이떠중이 몰려있어서 싫은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자신의 음악을 소수만 즐길 수 있는 고급문화라고 생각 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어떤 심오한 사람들만이 내 노래를 이해할 수 있다 라고. 심오하다기보다는 주파수가 맞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까 주파수가 넓어지면 기분이 나쁜 거죠. 내가 너무 쉽게 하고 있다. 어떤 비밀처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희귀한 영화를 남도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 기분이 나쁜 거랑 비슷하게. 그렇죠. 맞아요. 근데 아마추어증폭기는 거기서 벗어나려 하고 있어요.


본인의 취향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말씀이세요? 음.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취향이잖아요. 이건 별로지만 취향의 다양화를 위해서 만든다. 이런 건가요? 그게 아니고, 내 취향대로 하는 것이 지겹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지겹다. 하기 싫은 걸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것만 하지 않겠다. 2004년에 그렇게 해서 정말 좋았었죠.


만약 소년중앙이 주문 폭주 했다면 기분이 안 좋았을까요? 일단 주문폭주를 안 바랬죠. 기대 안 했는데 주문 폭주 했다면? 아 그러면 다음 앨범도 할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하면서 더욱 작업을 열심히 하겠죠? 그러니까 많이 팔리면 좋은 거죠? 예 많이 팔리면 해외여행도 가고. 하하하 근데 찍어내는 게 너무 힘들어서 많이 못 팔았을 거예요.


앨범을 만들어내는 행위자체가 그냥 음악을 들려주고 싶은 거랑은 좀 차이가 있는 특별한 행동이잖아요. 수록곡도 고르고, 앨범 컨셉도 잡고. 누군가가 앨범을 어떤 작품으로, 정성을 담은 것으로 여겨주고. 네. 그래서 지금 홍대에서 운영되는 인디레이블들이 더 상업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뮤지션을 체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레이블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저는 일단 음악 자체가 너무 아마추어적이어서 이런 음악을 레이블의 사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겠다 라고 생각 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요.


당시 핑퐁사운드에서 아마츄어증폭기가 상품성이 있겠다 생각해서 음반을 내게 되신 것 아닌가요? 네 저도 야심이 있었죠. 그거 인터뷰에서 다 밝혔는데. 웨이브 인터뷰에서. 하하 근데 그 야심은 너무 거한 야심은 아니고 작업을 밤새 하면서 키워진 그런 것 같아요. 의도가 아니라. 핑퐁사운드가 도산을 하고, 개인적으로 상처를 받았고..



인 터뷰 주제는 상당히 물질적인 것이었는데 점점 한받씨의 내면세계를 탐구하게 되네요. 그러니까 예전에 2003년에는 앨범 팔아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야심이 있었는데, 레이블 도산으로 상처를 받고 나서 음악을 직업으로 삼으면 굶어죽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거군요. 그런데 다음 앨범에 대한 기대는 또 가지고 계시고. 앨범을 많이 팔지도 모른다. 노래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했었어요. 핑퐁도 그렇게 생각을 했고..


네. 다그치는 것은 여기서 접도록 할게요. 고생하셨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일 단 예술을 안 하고 싶고. 예술가가 안 되고 싶고. 독립적으로 살고 싶긴 한데. 일단은 인디씬에서 계속적으로 노래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근데 현실적으로 들어가보면 좀 암울하긴 하네요. 소년중앙같은 경우에 좀 믿음으로 낸 것도 있었고. 지금 생산중단을 하면서 다시 넘어졌지만. 또 일어나서 앨범을 내고 싶고 공연을 계속 하고 싶고, 무홍보 무기획 무원칙의 연합전선의 축제를 기획하고 싶고. 이 인디씬이 자본이나 거대미디어시스템에 흡수되지 않고 지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바로 예술하고 싶다 라는 말로 들리는데요. (웃음)  마무리 하면서 인터뷰 마칠게요. 마지막으로 한 말씀. 지 금 홍대 앞에 라이브클럽에서 공연하시는 음악가들로 주로 구성된 이 흐름. 라이브 클럽주, 공연하시는 분들, 그걸 보러 오는 관객들로 이루어진, 즉 삼두마차가 이끌어가고 있는 이 흐름. 나름대로 이것이 저항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것들이 계속 되면 좋겠다. 그래야 저도 계속 공연을 할 것이고.

필자소개

연리목_인디뮤지션


출처 : http://indianbob.net/gnu/bbs/board.php?bo_table=webzine_special&wr_id=21

2009년 11월 2일 월요일

2009년 매일경제 인터뷰

[인디가추천하는인디음악③]아마츄어증폭기 "적나라함에서 느끼는 쾌감"

세 번째 릴레이 기사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앞서 인터뷰한 두 밴드의 리더들이 입을 모아 추천했다. '아마츄어증폭기'는 ‘한받’이라는 한 사람이 클래식 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원맨밴드다. 캐비넷 싱얼롱즈의 김목인은 그를 "자유자재로 노래를 담을 수 있는 뮤지션"이라 표현했고,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조웅은 "이 사람이야말로 인디뮤지션"이라 말했다. 가치가 있는 음악을 지켜내야 한다는 조웅은 지역적 아름다움(Oringin)을 느낄 수 있는 이 밴드의 음악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단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열혈청년은 20대 후반 겪은 절망의 시기를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혼자인 밤 포르노를 보며 느낀 고독을 알고 있는 누군가라면 아마츄어 증폭기의 나른한 노래가 그 씁쓸함을 달래줄 지 모른다.

그의 첫인상에 대한 느낌은 나긋나긋한 아마츄어 증폭기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와 비슷했다. 공연할 땐 형형색색의 가발과 진한 분장을 한 채 격한 퍼포먼스를 즐긴다는 것이 놀라울 만큼 어리숙하고 순박한 표정의 그였다.

2002년 첫 앨범 '29세의 자위대'로 인디씬에 데뷔한 그는 2집 앨범 '극좌표'(2004), 3집 '소년중앙'(2006)을 발매했고 올해 안으로 4집 앨범을 낼 계획이다. 3집 앨범 소년중앙은 손수 2백장을 찍어 팔고 품절시켜버렸다. '더 이상 판매할 필요가 없다'는 게 단순한 이유였다.


▶두 명이나 본인을 추천했다. 기분은 어떤가?

두 분다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이다. 영광이다.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조웅이 소년중앙 앨범에 담긴 '전입미답의 경지를 크레이지' 라는 곡을 추천했다. 가사가 좋다고 하더라.

최근에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가 그걸 카피해서 공연했다. 그렇게 좋은 노랜가 싶은데 좋아해주니까 고맙다. 한 여름날 사랑하는 연인 혹은 친구와 뭔가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내용을 대화하는 식으로 풀어본 거다. 사실 (일반적인) 사람들은 가사로 써놔도 그 느낌을 잡아내지 못한다.

▶개인사를 담은 건가?

일부러 담으려고 한 건 아닌데 나한테 각인된 그런 이미지니까. 가사 속에서 그런 것들이 툭 튀어 나올 때가 있다.

▶인터넷에 올리는 글을 보면 시처럼 글을 쓰더라.

평소에 메모를 많이 한다. 어릴 때부터 그게 습관처럼 되어 있어서. 그때 그때 생각나는 재미있는 아이디어나, 나름대로 시라고 생각하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툭툭 생각나면 적는다.

▶인터넷에 올라온 프로필에는 기타에 삐에르라고 적혀있던데, 객원 멤버인가?

(웃음)기타 이름이 삐에르다. 기타가 몇 있었는데 가장 최근의 기타가 삐에르다.

▶하하! 착각했다. 음악은 어떻게 하게 됐나?

영화음악을 만들려고 시작하게 됐다. 단편영화를 찍었는데 영화음악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기타를 배웠고 기타 배우자 마자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마츄어증폭기는 무슨 뜻인가?

아마츄어(amature)는 포르노 하위장르다. 한 때 아마츄어 동영상을 많이 봤다. 또 전공이 전자공학이다. 거기서 주요 학문 중 하나가 증폭기를 다루는 학문이 있다. 어느 순간 툭 하고 조합이 됐다. 아마츄어 증폭기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좋았다. 아마츄어 라는 포르노 장르는 길거리에서 서로 일면식도 없는 여자분을 바로 섭외해서 그 사람을 대상으로 포르노를 찍는 것이다. 그런 날 것. 날로 된 것에 뭔가 담겨 있지 않나. 날로 된 것 안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느낌이다.

▶가사에 쉽게 접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다. 포르노관련 내용도 들어가 있고.

하드코어한 것들 있다. 내가 추구하는 것 중 하나는 적나라해지는 것이다. 적나라해짐으로써 쾌감을 얻는다. 그런 것을 추구한다. 거리낌없이 가사를 쓰는 부분이 있다.

▶처음 노래로 먼저 접했을 땐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웠다. 그런데 사진을 찾아보고 분장한 모습에 충격받았다. 극적 효과를 노리는 건가?

(웃음). 맨 처음에는 거부감도 있다. 그런데 멜로디가 단순 반복이라 자꾸 들으면 익숙해진다.

▶요즘 대세라는 후크송인가?

후크송이라고 볼 수 있다. 중독돼서 좋아하는 분들도 있고. 대부분 공연 의상도 그렇고 퍼포먼스도 그렇고 과격하고 이상하기도 해서 처음엔 거부감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세상이 그렇지 않은가? 부드럽고 온화할 것이라 생각하고 세계에 나오면 사실 세계는 하드코어한 존재니까.






▶영화인으로선 어땠나?

단편영화를 찍었다. 대구에서 활동하던 독립영화인이었다. 20대는 거의 영화와 함께 했다. 20대 초·중반 가장 왕성한 나이에 영화를 만들면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20후반에 절망의 시기를 겪었다. 그리고 30대에 아마츄어증폭기로 활동했다. (내가 만든) 단편영화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않은 실험적인 영화다. 감정은 분명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담긴 비내러티브 영화'.

▶영화에서 추구했던 것들이 음악적 성향과도 연결되나?

연결이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 다른 솔로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어떤 이는 아마츄어증폭기 노래나 그런 솔로프로젝트의 노래를 들으면서 ‘상당히 시각적이다’, ‘영화같다’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영화를 보고 싶다.

동영상 커뮤니티 유튜브에 짤막한 단편들을 올려놓은 것이 있다. 잠깐 만나볼 수는 있다. 비믈라(BMLA)라고, 약자를 많이 썼다. 비믈라는 나이가 많이 들어 20대 후반에 만든 디지털 단편영화다. 그 때는 비디오로 많이 찍었다. 하이파이나 8mm 비디오로 많이 했는데 그때 영화들은 지금 보기는 힘들다. 개인적으로 보관은 하고 있다.

▶그 영화에도 본인이 만든 음악을 사용했나?

내가 만든 음악을 쓰기도 하고 다른 음악을 쓰기도 했다.

▶왜 하필 기타를 사용했나? 다른 악기도 많았을텐데.

그 때 옆에 기타가 있었다. 기타로 영화음악을 하기가 쉽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꿈이 영화감독이었다. 영화감독으로서 포부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 자기가 만든 영화가 뛰어나지 못하다는 평가를 듣고, 실망하고 절망하게 됐다. 그래서 20대 중반에 접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개인사적인 사건들을 겪으면서 나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를 보냈다. 그 때 내 옆에 기타가 있었고, 기타로 노래를 치면서 부르는데 나를 많이 위로해줬다. 그러면서 노래도 그 시절 많이 만들어지고. 내 자신을 위로하면서 만든 노래들이 아마츄어 증폭기의 초창기 노래들이다.

▶최근의 활동은 어떤가?

요새는 아마츄어증폭기 공연은 안하고 4집 앨범 거의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다. 또 다른 프로젝트를 많이 한다. 펑크 밴드에서 베이스치고 있기도 하고, 또 다른 솔로 프로젝트를 하는데 댄스음악 프로젝트다. 그리고 아마츄어 증폭기보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음악 프로젝트. 이렇게 세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공연도 하고 있고. 요즘은 주로 내가 공연을 기획해서 쌈지나 살롱 바다비 이런 데서 공연한다. 이제 오래 하니까 거의 아티스트로 대접을 해서 가끔은 갤러리에 초청돼서 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할 때도 있다.

▶어떤 무대가 제일 편한가?

그냥 클럽에서 하는 게 편하긴 편하다. 단점은 음악 매니아들이 요즘은 많이 없다. 보러 오는 관객이 별로 없다.

▶관객이 없다니? 요즘 인디음악 듣는 사람이 늘지 않았나?

취향에 따라 구분이 돼서 요즘은 펑크 음악을 하면 관객이 거의 없다. 모던록에 관객들이 주로 몰린다. 취향에 따라서 많고 적은 게 뚜렷해졌다. 그런 부분들을 느낄 때 많이 힘들다. 갤러리나 이런 곳에서 공연하면 부담이 된다. 주목 받게 되고, 특히 클럽보다 장비들이 좋지 못하다. 그래서 기술적인 측면에서 제대로 된 공연을 하기 힘들다. 길거리 공연은 워낙 즉흥적인 요소가 많아서 좋을 때는 정말 많은 감흥을 주지만 안 좋을 때는 완전히 실패하는 공연이 된다. 하지만 가장 짜릿한 순간을 주기도 한다.

▶기억나는 공연이 있다면?

뭐, 하도 많이 해서 거의 몇 개가 있는데 하나는 외국에서 한 거. 일본 히로시마 에서 길거리 공연. 히로시마는 시내가 전부 아케이드로 돼있다. 그 아케이드에 밤이 되면 길거리 뮤지션들이 공연한다. 길을 걷다가 부탁해서 기타치고 노래한 적 있다. 최근 대만에 가서 대만의 클럽에서 음원을 주면서 한 번 공연 좀 하게 해달라고 했다. 엄청 떼를 써서 공연을 했지. 뭐랄까, 가장 뭉클했던 공연은 프린지페스티벌에서 공연했을 때다. 광장 같은 곳에 있는 무대에서 비를 맞으면서 한 시간 동안 공연을 했다. 그 때 관객 중 한 명이 우산을 받쳐주기도 했다. 내 노래 중 비를 테마로 한 노래가 많은 데, 비를 맞고 땀과 눈물이 뒤범벅된 채 비를 테마로 한 노래를 불렀다. 가장 뭉클했다.

▶공연하는 게 재미있을 것 같다.

재밌지. 엄청. 뭔가 정해진 게 없다. 우연적인 요소가 많아서 어떤 사건이 생길 지도 모르고, 기대를 많이 하게 한다.

때로는 배추를 던져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관객들한테 마늘이나 야채 같은 것, 맞아도 안 아픈 걸 던져달라고 한다. 왜냐하면 내 음악이 형편없다는 것을 표현해달라는 의미다. 실제로 야채 가져와서 던지고. 그거 가져와서 요리 해먹기도 하고.

▶와하하! 그 걸로 요리를 해먹다니.

이런 경우도 있었다. 한 팬이 일부러 야채를 던져줬는데 그거 안 가져 갔다고 실망하기도 했다.

▶맞으면 기분 나쁘지 않나?

그걸 즐기는 거다.

▶본인의 음악이 정말 형편없는 음악이라고 생각하나?

왔다 갔다 한다. 진짜 형편없는 음악이라고 느낄 때도 있고 어쩔 때는 이 나라에서 최고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특정한 곡에 대해 그렇게 느끼는 건가?

아마츄어증폭기라는 존재와 그가 하는 공연, 그리고 노래들에서 총체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럼 어느 때 자신의 음악이 형편없다고 느끼나? 또 최고라고 느끼는 곡이 있다면?

뭐라고 해야 되나. 내 음악 특징이 코드가 거의 비슷한 노래가 많다. 코드는 비슷한데 가사가 달라서 다른 느낌이 드는 거다. 그런 부분이 있을 때는 '이거 참 너무 형편 없구나, 이거 뭐 코드는 똑같은데 가사만 바꿔서 재탕 삼탕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고. '금자탑' 같은 경우는 '극좌표' 앨범의 첫 번째 노랜데 내가 녹음하고 내가 빠져들었다. 녹음하고 나서 들으니 너무 좋았다. 정말 빠져 들었다. 그리고 '황홀경'은 같은 앨범 제일 마지막 노랜데 녹음하고 나서는 '이거 정말 대단한 노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이렇게 진실함이 담겨있는 노래인 것 같았다. 그 두 곡이 좋았던 것 같다.

▶'진실함'이란 무엇을 말하는 건가?

그 당시에 살짝 녹음하는 기간에 살짝 (컨디션이) 다운돼 있었다. 그 때 뭔가 자각이 들더라. 가사에 허약한 이상주의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허약하다는 건 예전부터 느꼈다. ‘나’라는 존재는 허약한 가계(家系)에서 태어난 허약한 사람. 허약한 사람이 계속해서 태어난 가문에 내가 최종 끝단에 있다는 생각을 20대 초·중반부터 했다. (내가) 이상주의자라는 건 몰랐다. 어느 순간 그게 생각이 났나 보다. 허약한 이상주의자라는 것이 가사에 쓰였고 그 깨달음까지의 과정이 가사에 담겨 있어서 진실하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첫 공연은 어땠나?

공식적인 공연은 홍대의 클럽 '빵'에서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서 2003년 4월 20일 처음 공연을 시작했다. 거의 6년 지났네. 참 많이 지났다. 아마츄어증폭기는 이제 노장, 원로 대접을 받기 시작한다(웃음). 새로운 뮤지션이 많아서 이제는 클럽 빵에서 공연도 안하고.

대구에서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그는 홍대 클럽 '빵'의 오디션을 통과하고 2003년 4월 20일 처음 공연을 시작했다. 그와 인터뷰를 한 23일은 만으로 데뷔 6년 가까이 되는 날이었다. 그는 클럽에서 신인 뮤지션들의 공연을 뒤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 이젠 노장대접을 받는다며 겸연쩍어 했다. 그런 그가 은퇴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게된 것은 무척 갑작스러웠다.






▶은퇴하게 된 이유?

일차적으로 결혼을 하게 됐다. 아마츄어증폭기의 중요한 모티프는 외로운 남성의 감정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게 되면서 그 감정이 증발해버린 것이다. 주요 모티프가 없어져서 아마츄어증폭기 존재 가치가 사라졌다. 두 번째 이유는 아버지가 돌아 가신 것이다. 아마츄어증폭기의 노래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 반항심도 작용했다. 아마츄어증폭기가 아버지에 대한 어떤 적대자로서 기능하다가 아버지가 사라지면서 그 기능도 없어졌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음악가라는 것은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팬, 청취자도 있고 지켜보는 사람들 많이 있었는데 그걸 간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앨범을 준비하는 것이다. 아마츄어증폭기를 기억하는 팬들에 대한 하나의 선물로.

▶모두 새로 작곡한 것들인가?

아니다. 새 곡도 들어있는데, 공연은 했으나 음원으로 남겨져 있지 않던 곡들을 담고 있다.

▶아쉬워하는 팬들이 많은가?

팬들이 좀 있더라. 팬이 많지 않지만 극소수 열렬 팬들이 많이 아쉬워했다.

▶작업은 주로 어디서 하나?

집에서 한다. 아이 맥으로 녹음하고 있다. 맨처음에는 PC를 썼는데 직장에서 맥을 접하면서 바꿨다.

▶직장은 언제부터 다녔나?

2003년 대학 졸업하고 대구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음악은 별로 생각 안했다. 일자리 구한다고 했는데 이력서를 몇 백 통 써도 면접도 없고. 그래서 취직하려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올라온 김에 아마츄어증폭기 노래 한번 해볼까 생각이 들어서 오디션을 봤다. 공연 시작한 시점이랑 취직한 시점이 거의 비슷하다.

▶일하면서 공연하는 것이 힘들진 않나?

비정규직이고, 힘든 일이 아니라서 공연하기는 괜찮았다.

▶수익은 어느 정도 돼나?

공연수익은 별로 없다. 가끔 축제나 갤러리에서 하면 거마비 정도 받는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받아본 건 70만원 정도. 그게 가장 많이 받았을 때고 보통은 5만원정도. 10만원 받을 때도 20만원 받을 때도 있다.

클럽공연은 거의 (수익이) 없다. 클럽은 수익구조가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그래서 문제점이긴 한데, 클럽 공연해서 돈 받아 본적은 손에 꼽을 정도. 아마츄어증폭기로 350회 정도 공연했는데 클럽공연에서 공연비 받아본 걸 손에 꼽으면 말 다했지.

▶인디음악의 시스템구조에 문제점이 많은 것 같다.

시스템이나 돌아가는 구조가 사실 많이 열악하다. 그래서 최근 장기하씨가 뜨고 했지만 장기하와 얼굴들이 뜬다고 발전한다는 보장이 없다. 그런 부분에서 클럽이나 뮤지션이나 이런 분들이 각성을 하고, 노력해야 하는데 클럽은 클럽 나름대로 관성으로 가고 있고 뮤지션들도 클럽에 이끌려 가는 편이다. 앞으로도 계속 암울하다.

▶인디음악의 미래가 긍정적이지 않다는 얘긴가?

긍정적으로 안 본다. 많이 어둡다. 개인적으로는 뮤지션들 모아서 얘기하려고 하는데 클럽에서는 소통을 안 하려고 하니까. 물론 몇몇 클럽은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 대부분 클럽은 전혀 관심 없다는 식이니까. 전체 신을 생각한다기 보다 클럽만 잘되면 된다는 식이다.

▶개인적으로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게 있나?

본보기를 마련해보자는 의미로 음악가들 모아서 우리가 클럽을 운영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의 관성적인 클럽과 차별화 해야 하지 않은가?

그 부분은 계속 논의를 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뮤지션들에 대해 공연한 것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클럽의 지원이 그렇게 약한가?

클럽과 뮤지션들이 동등한 위치가 아닌 것들이 있다. 90년대 중반 처음 인디씬이 태어났을 떈 분위기가 달랐다. 즐기자는 분위기고 공연 수익에 신경 안 썼는데 지금은 사회자체가 상당히 실용성에 중심을 두는 그런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으로 음악가들은 공연하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식으로 이끌면 안된다. 대화에도 적극적이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아쉽다. 내가 6년 동안 활동하면서 깨달은 거다. 처음에는 몰랐다.

▶대부분 뮤지션들은 그런 것에 대해 생각 안하고 있지 않나?

생각 못하는 수도 있고, 처음엔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니면 그냥 귀찮아서 생각 안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음악만 하면 된다는 경우도 있다. 또 좋은 음악하면 뜨지 않느냐 하는 식으로. 그것도 어떻게 보면 개인적인 태도다.

▶인디밴드(Independent Band)라는 게 사실 그런 의미 아닌가? 자본과 독립적으로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하는 뮤지션들?

그게 말장난이다. 자본과 독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도 하나의 트렌드고 장르라고 본다. 자본과 독립한다는 그러한 운동적인 성격은 말장난이다. 미디어나 평론가들이 자기들의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90년대 중반 그런 용어를 만들어냈다. 그들이 현재의 인디를 설명할 적확한 개념을 형성을 못했기 때문에 90년대 중반 생긴 개념을 쓰는 거다. 지금 현재 인디씬은 그런 독립의 의미가 전혀 아니다.

▶그렇다면 본인이 생각하는 인디밴드에 대한 실질적 개념은 뭔가?

인디에서 많이 벗어났다. 그러니까 많은 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경계가 모호해졌다. 장기하 같은 경우 많은 대중매체나 자본 쪽으로 많이 들어가있다. 기존의 인디라는 개념 자본으로부터 독립돼서 자의식이 강한 아티스트, 반자본주의 운동적 성격이 강했다면 지금은 희석됐다고 볼 수 있다. 음악스타일로서 진솔한 가사. 전혀 꾸밈없는 그런 음악. 그리고 또 88만원 세대 용어가 뜨면서 그들의 감성에 맞는 그런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인디씬을 적확히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인디’라는 것이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인디는 아닌거지.

▶인디 뮤지션들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어두운 면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인디씬이 발전이 안된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잠정적 결론은 무모든 구성원들이 게을렀다는 것이다. 평론가를 예로 들면, 인디라는 개념만 계속 밀고 갔지, 현재 이 시점에 부합되는 개념을 발명, 발견해내지 못한 ‘혐의’가 있다. 음악가들은 자기들 공연, 앨범에 대한 유통 개발에 부지런함 없이 특정 레이블에 들어간다든지 공연에서도 클럽의 일정에만 따라간다든지. 자기들끼리 공연을 기획하지 하지 않고 클럽의 일정에만 따라간 것이 문제였다.

그 다음, 클럽은 공연 레퍼토리가 90년대 중반이래로 전혀 변하지 않다. 형식상으로 변하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일정을 잡고. 클럽이 제일 발전하지 않았다. 수익배분에 있어서도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운영에 급급해서 홍대 상권이 발전하면서 임대료가 높아진 문제가 있지만 거기에 맞게끔 참신한 기획을 한다든지 했어야 했다. 그런 게으름.

관객들의 혐의는 제일 가볍게 볼 수 있는데, MP3에 대한 무자비한 유통-무상유통에 대한 부분도 있고, 공연을 보러 오지 않고. 다운받아 듣기만 한 것도 있겠지.

▶개인적으로 서고 싶은 무대가 있나?

개인적인 추억의 장소인 하동 섬진강 모래사장에서 공연하고 싶다. 어떤 절망의 시기를 보내다가 서서히 수면위로 올라오던 시점에 하동에서 몇 개월 정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다. 그때 전라도도 처음 가보고. 전라도에 대한 환상이 있었는데 너무 좋더라.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 섬진강이 있는데 바다 같고 너무 좋았다. 그 때 하동이 벚꽃이 유명했다. 자취집 창문으로 벚꽃잎이 떨어지던 것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 때가 20대 후반이었으니까 내 젊음의 한 시대가 사라지는 시점에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거기서 보냈다.

▶유학은 왜 가려고 하나?

원래 꿈인 영화감독의 꿈을 더 늦기 전에 이뤄보고 싶다. 그래서 가게 됐다. 큰 결심을 했다. 부인이랑 같이 간다. 영화 관련해서 공부를 하게 될 거다. 감독 데뷔가 언제가 될 지 모르겠지만.

▶영화든, 음악이든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먼저 뭔가를 말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고, 내 노래나 음악이나 영화를 보면서 막연하게 어떤 감정이 느껴졌으면 좋겠다. 거기서 내가 느꼈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됐으면 좋겠다.

▶시나리오 생각해 둔 것이 있나?

시나리오는 간단하게 많이 써뒀다. 그 중 하나는 울산 노동자가 채팅하다가 아오이유우를 닮은 여자를 만나러 서울로 왔는데 못보고 간다는 얘기다.

▶와하하(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재미있는 시나리오다! 본인 얘긴가?

내가 그렇게 찌질 하진 않다(웃음).

▶아오이유우를 평소에 좋아하나?

친구랑 주변사람들이 엄청 좋아하더라. 노동자가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인터뷰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프랑스 유학을 가더라도 한국에서의 음악씬에서 가졌던 그 경험들과 팬과의 소통들, 그리고 감동들 그것들이 내 안에 있으니까 프랑스에 가서도 음악활동이나 공연활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츄어증폭기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니까 (팬들에게) 너무 실망하지 말고 힘내시라고 전하고 싶다.

▶꿈이 있다면?

꿈은 이루어졌다. 영화감독 꿈을 키우면서 소박했지만 나름대로 진실했던 꿈은 내 영화를 봤을 때 한 명이라도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내 영화를 최고의 영화·감동적인 영화로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마츄어 증폭기의 노래를 듣고 분명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 언제까지나 빛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소박한 꿈이 이뤄진 것 같다.

프랑스 가면 뭔가 새로운 꿈을 찾아서 할 수 있겠지. 참고로 며칠 전에 ‘레볼루셔너리 로드’라는 영화를 봤다. 프랑스 파리로 꿈을 찾아서 가려다가 안가고 끝내는 아내가 죽는 슬픈 내용인데 아내와 둘이 봤다. 보면서 ‘우리 내용 이잖아’하고 생각했는데 우린 꼭 갈 거다.

▶이 기획 기사는 추천릴레이라 다른 사람 음악을 추천해야 한다.

웃긴 얘기지만 나는 내 음악이 너무 좋아서 평소에도 내 음악만 듣는다. 개인적으로 아마츄어증폭기의 열렬한 팬이다. 한국에서는 ‘강병철과 삼태기’ 이후로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 분들을 존경하고 좋아한다.

▶그럼 본인의 음악 중 하나를 추천해달라.

뭉클한 노래가 하나 있다. ‘남보원’이라고 소년중앙에 실린 노래다. 50년대 전쟁을 겪으신 윗 세대 분들의 어려웠던 모습이 떠오르는 노래다. 나는 (전혀 그 시절을) 겪진 않았지만.

▶음원사이트엔 없는데, 어떻게 들어볼 수 있나?

남보원을 누가 인터넷에 올려놨던데. 아는 사람이라서 용인하고 있다. 검색하면 나올 것.

▶아마츄어 증폭기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프랑스어로 해달라.

댄스 프로젝트 음악 중 포함된 곡이다. 세상에서 당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뜻이다. ‘쥬뗌므 르 쁠리스 어몽 드’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김보람 인턴기자]




출처 : 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9&no=249940

2009년 2월 11일 주간한국 인터뷰

[루저문화를 아시나요] "88만원 세대 전형, 나는 소작농이다"
전 '아마추어 증폭기' 한 받 씨
척박한 노동환경의 비정규직 일상 보여주는 듯한 음악 공감대 얻어



김청환기자 chk@hk.co.kr
사진=임재범기자 happyyjb@hk.co.kr


"물 좀 주소. 목 말라요. 물 좀 주소. 목 말라요. 목이 막혀 죽을 것만 같소"

힘없는 목소리가 물기 없이 흐른다. 약간은 기괴한 리듬에 통기타 연주, 스스로 내는 박수 소리로 리듬에 장단을 맞춘다. 단발머리 가발에 선글라스, 체크치마에 하와이안 셔츠를 받쳐 입었다.

머리에 쓴 초록색 모자에는 새마을 운동 마크가 선명하다. 노숙자의 모양새를 닮아있다. 서울 마포구 홍익대 앞에서 길거리 공연을 펼치는 전 <아마추어 증폭기>, 현 <야마가따 드윅스터> 한 받(35) 씨의 공연 모습이다. 6일 한국일보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

최근 한 씨는 일단의 인디밴드들과 함께 한대수의 노래 '물 좀 주소'를 리메이크 했다. 지난 2003년부터 이화여대 인근에서 공연을 시작한 그는 홍대 앞에서 매년 열리는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전위적인 공연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2008년에는 <로우 파이 오페라>란 제목으로 공연했다. "대본을 대놓고 보면서 이야기하고 노래도 즉흥적으로 하는 말 그대로 허접한 공연이었다"는 게 한 씨의 말이다. 2004년 공연에서는 관객들에게 양파를 주고 자신에게 던져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형편 없는 나의 음악과 음악가들의 어려운 현실을 허접한 그대로 보여주려 했다"며 "관객의 야유를 받고 그대로 관객과 소통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스스로를 비관하지만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유머코드를 담고 있는 88만원세대의 '루저(Loser; 패배자)'정서의 전형이다. 한 씨는 "그저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면서도 "내가 처한 현실과 비슷한 이들이 많다보니 공감대를 얻는 것 같다"고 말한다.

"나는 소작농이다." 한 씨가 말하는 자기정체성이다. 그가 만든 <소작농>이란 노래는 동유럽의 소작농이 휴대폰으로 아내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내용이다. "지금 뭘 생각해요. 나는 당신을 생각합니다." 한 씨는 2003년 대학을 졸업했으나 1년여 동안 100여군데 원서를 넣고도 정규직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비정규직으로 한달 120여만원의 월급을 받으며 서울의 홍대앞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한다. 2000년에는 사업에 실패해 동유럽으로 가 집시가 되겠다며 집을 뛰쳐나왔다. 중국을 거쳐 홍콩으로 갔다 길거리 공연을 하며 노숙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가 음악에 빠진 계기 역시 '루저'의 정서를 안고 있다. 원래 영화감독이 꿈이었던 그는 대학에서 독립영화를 만들었으나 25살 때인 1999년 주위의 부정적인 평가를 듣고 좌절한다. 그는 혼자 집에서 기타를 튕기기 시작했고 음악에 심취한다.

그러나, 그는 좌절로 상황을 끝내지는 않는다. 그는 2003년부터 홍대앞에서 <아마추어 증폭기>로 노래를 불렀다. 2005년에는 연주자인 노트북과 '싱어'인 자신이 팀인 2인조 댄스음악 그룹 <야마가따 드윅스터>를 결성했다.

그가 만든 '쥬뗌므 르 쁠뤼 아몽드'란 곡은 '세상에서 당신을 가장 사랑해요'란 의미를 담고 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단식투쟁 현장 공연에서 댄스음악에 흥겨워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가 떠올린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곡이다. 그는 "일터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도 투쟁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한 씨는 이달이면 계약이 끝나 전업 음악가로서 활동을 시작할 계획이다. 작년에 결혼한 그의 아내 역시 비정규직으로 이달에 근로계약이 끝난다. "대양에 떠 있는 돛단배 같은 상황이 될 것"이라면서도 "공연비를 올려야겠죠"라고 너스레를 떠는 그의 표정이 어둡지만은 않다.

그의 음악과 삶의 태도는 '비관'에서 '유머'로 가는 '루저'세대 그 자체다.


출처 : http://weekly.hankooki.com/lpage/coverstory/200902/wk20090211094341105430.htm

2007년 7월 20일 한겨레21 669호 인터뷰

[한받]아마추어 증폭기에 야유를!


▣ 정재원 인턴기자arsenlupin007@cyworld.com

“땡~땡~땡.”





오후 6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한받(33) 씨는 마음이 급해진다. 그가 변신을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신데렐라’도 아닌 그가 도대체 무슨 변신을 한다는 걸까? ‘한국영화아카데미’라는 영화학교 조교에서 ‘밴드 가수’로의 변신이다. 그가 활동하는 밴드의 이름은 ‘아마추어 증폭기’. 혼자서 노래하고 기타 반주도 하는 ‘원맨 밴드’지만 벌써 3집까지 냈다. 한받이라는 자신의 이름도, 밴드 이름도 그가 직접 지었다. “아마추어는 포르노의 하위 장르이고, 증폭기는 보통 우리가 앰프라고 부르는 건데, 어느 순간에 두 단어를 조합하자 외로운 남자의 이미지가 연상됐어요.”

낮에는 영화학교 일로, 밤에는 뮤지션으로 활동하느라 바쁜 한씨는 최근 더욱 분주해졌다. 8월14일 시작하는 ‘프린지 페스티벌’ 공연 준비 때문이다. 프린지 페스티벌은 인디음악, 인디미술 등 일종의 인디문화 공연축제이다. 영국의 에든버러 축제에서 시작된 축제는 올해로 국내에서만 10회째를 맞고 있다.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한씨는 유명 인사다. 양파 투척 사건 탓이다. 2003년부터 프린지 페스티벌에 참여했던 한씨는 3년 전 공연에서 자신을 향해 양파를 던져달라고 관객에게 주문했다. “저는 제 음악이 형편없다고 생각해요. 내 음악을 과소평가하다 보니 관객의 야유를 받고 싶었어요. 그렇게 관객의 반응을 느끼면서 대중과 소통하는 거죠.”




그렇게 던져진 양파는 몇 달 동안 그의 양식이 됐다. 양파에 ‘맞고’, 양파를 ‘먹어’가면서 음악을 하는 한씨이지만, 그가 처음부터 인디음악의 길을 걸었던 건 아니다. 원래 전자공학도인 그는 어릴 적부터 영화감독을 동경해왔다. 1999년부터 20001년까지 20여 편의 단편영화를 만들 정도로 영화에 대한 그의 열정은 대단했지만, 아무도 그의 영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방구석에 앉아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예술가의 비애를 느끼고 있을 때, 슬며시 다가와 그를 위로해준 건 음악. 거칠지만 솔직한 그의 목소리는 슬픈 기타 반주와 묘하게 어우러진다. “예술을 하지 않기 때문에 힘든 점은 없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의 음악을 학대하면서도 대중과 소통하는 한받씨. 그런 그가 이번 프린지 페스티벌에서는 무엇을 던져달라고 외칠까?

출처 :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0269.html

2007년 2월 27일 Weiv 인터뷰

아마츄어 증폭기 인터뷰: 나는 성실한 음악을 하고 싶다 김태서 uralalah@paran.com | editor. 일시: 2006년 2월 27일 장소 및 시간: 클럽 <빵> 근처 카페, ...


2005년 8월 24일 프린지페스티벌 인터뷰

'아니요 내가 바로 우주인걸요' 아마추어 증폭기
2005/08/24 오후 11:58 | 서울프린지2005 | [hwa_onvacation]

 

늦 은 화 요일 밤. 로베르네 집에서 그의 공연이 있었다. 그의 공연은 콩트가 되기에는 너무 진지했고 그의 행위는 과장되지 않았다. 그래 서 감상하는 무리들은 차마 크게 웃지 못하고 마치 그를 이해하는 냥 로베르네의 붉은 조명 아래, 심하게 흔들리는 눈빛을 감춰야 만 했다. 그 와중에 데일리는 뒤쪽에 서서 그윽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아주 예쁜 한 여자를 발견했다. 아마도 그녀가 그의 여자친 구임을 확신하며, 데일리는 계획한 취중 인터뷰가 무산되리라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렇다면 이는 진짜 비극일 텐데. 셰익스피어 의 4대비극보다 더 지독한.

결 과적으로 그 예쁜 여자는 그의 여자친구가 아니었지만 그는 술을 끊었다고 했다. 우리 의 취중 인터뷰는 무산되었지만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진행된 인터뷰는 그에 못지않은 결과를 낳았다. 약간의 편집을 가하려 고 했지만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대로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이 여름에 하얀색 굵은 폴라 스웨터를 입고 나타난 그와의 정신없는 인 터뷰, 즐겨보자.


프린지 데일리(이하 데일리): 공연 때 마다 의상이 독특하다. 컨셉이 있는가.


아마추어 증폭기(이하 증폭기): 주요 컨셉은 없다. 그냥 색깔이나 모양등 시각적으로 튀는 것을 입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데일리: 아마추어증폭기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증 폭 기: 아마추어는 포르노의 하위 장르다. 증폭기는 내가 학교 다닐 때 전공이 전자공학이어서 증폭기를 많이 배웠다. 어느 순간 에 두 단어가 조합이 되면서 자체가 주는 느낌이 좋아서 쓴다. 아마추어 증폭기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것은 2003년부터이다.


데일리: 다른 직업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연을 자주한다. 힘들지 않은가.


증 폭 기: 2003,2004년에는 엄청 많이 했다. 밴드 활동도 하고 있었고. 지금은 그때에 비해서 덜 하고 있는 편이다. 그냥 돌아간 다. 사람이 기계라고 한다면 그냥 돌아가고 있는 순간에 나오는 느낌, 그럴 때 기분이 좋다. 가만히 있으면 우울해진다. 그래서 뭔 가 일을 더 벌이려고 한다.


데일리: 한예종 영상원에 있는 걸로 아는데 영화작업도 하는가.


증 폭 기: 단편영화를 찍고 있다. 단편영화는 거의 몇 년간 못 만들다가 오랜만에 만들고 있다. 그간 음악활동을 하느라. 고등학교 때부 터 단편영화작업을 했었고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9월 24일 토요일에 빵에서 회고전을 한다. 원래 계획은 20대중반에 출국기념 회 고전을 할 생각이었다.




데일리: 언제부터 음악을 시작했나.


증 폭기: 기타 를 처음 잡은 것은 1996년도이다. 내가 만든 영화에 음악을 직접 만들어 보자는 의도로 만들었다. 양희은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을 듣고 다음날 바로 노래를 만들었다.(양희은의 곡인지는 분명치 않다.) 음악 공연을 1000회 이상하는게 목표다. 지금 163 회 정도 한 것 같다. 웃기지 않나.


데일리: 가사들이 소소한 일상의 나열로 이루어진다. 애써 심오하지 않으려 하는데 오히려 느낌이 독특하다.


증 폭 기: 나는 일체의 심오함을 부정한다. 쉽게, 길가다 떠오르는 것들, 보통은 기타치면서 떠오르는 말들을 가사로 만든다. 특별히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다. 진지한 것들의 무게감이 싫다. 가끔 내가 내 가사를 듣고 찡할때가 많다. 예를 들면 그랑프리 같은 경우 엄마 와 아들의 대화를 가사로 한건데 맨끝에 이런 말이 나온다. 쓸데없는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내리는 이 비와 현재를 감상하자. 내 가 만들었지만 감동이다. 자아도취가 강한 편이다.

데일리: 나름대로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지만 상황이 웃기다. 가사라든지, 넣는 음이라든지. 관객들은 그 상황이 희극적이지만 진지함에 눌려 웃지 못한다. 어떤가.


증폭기: 진지함에 억눌리면서도 희끗희끗 나오는 일상적인 유머를 즐기기를 바란다. 완전히 즐겼으면 좋겠다. 진지한 것은 없다. 유쾌함에 몸을 담구고 뿅뿅 춤을 춘다든지. 울어도 괜찮다.


데일리: 공연하면서 그런 관객들을 볼때 어떤가.


증폭기: 내 공연이 장난으로 보이는가.(웃음) 농담이다. 너무 귀엽다.


데일리: 음흉한게 아닌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관객을 귀엽다고 하다니.


증폭기: 미안하다. 나는 그걸 즐기고 있다.


데일리: 곡을 언제 쓰는 편인가.


증 폭 기: 공연 가기 전, 연습삼아 치다가 노래를 즉흥으로 만들고, 벤치에서도 만들고 한다. 내가 자주 찾아가는 아지트에 가서 길어오 는 느낌도 있다. 음악의 여신이 사람들 위를 돌아다니다가 내 위에 왔을 때 똥을 누듯이 내 머리와 접촉했을 때 만든다. 공연하 는 순간에 즉흥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내 노래는 휘발성이다. TP3 같은 매체에 빨리 녹음을 해놔야 한다. 가사는 기록해 놓지만 나머지는 다 머릿속에 넣어두고 있다. 내가 죽으면 내 음악은 그대로 묻혀진다. 죽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데일리: 평소에 책을 많이 읽는가.


증 폭 기: 나는 책에 중독되어 있다. 예전에는 술, 커피, 질료 포도주에 중독 되어있었다. 그걸 다 끊고 지금은 책에 중독 되어 있 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책을 빌리고 갖다 주는 것에 중독 되어 있다. 마포, 서대문, 동대문, 도봉, 학교 도서관, 종로, 용 산, 남산. 거의 모든 도서관을 섭렵하고 있다. 주말마다 도서관 투어를 한다. 일종의 여행이다. 책을 보는 것도 여행이다.




데일리: 클럽 빵에서 공연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증폭기: 빵은 즉흥적 공연이 힘들다. 형식이 있기 때문에. 빵에 귀신이 있다. 그 귀신이 즉흥으로 공연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다. 오시는 분들도 조용하고 내성적이기 때문에 내가 과격하게 하면 울지도 모른다.


데일리: 그 귀신은 어떤 귀신인가.


증폭기: 모르겠다. 가끔 내가 노래할 때 내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기도 한다. 귀신이 들어오는 순간 나는 미쳐버릴 것이다. 아마 조만간에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귀신에게 밑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데일리: 프린지에 2003년부터 봤었다. 계속 참여하는데 어떤가.


증 폭 기: 확장되면서 깎이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 개인적으로 이야기 하면 처음 빵에서 공연할 때 놀이터에서 빵으로 공간이 확장되 면서, 나는 축제가 변방에서 이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작년에는 거리전체로 축제가 확장되면서 축제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 다. 올해는 그런 느낌이 적다. 하지만 정리되는 느낌이다.


데일리: 작년에 프린지에서 공연할 때 스태프들이 밑에서 양파를 던지던데 왜 던지는 건가.


증 폭 기: 내가 주문했다. 양파 배추 등 맞으면 아프지 않은 걸로. 내 음악이 형편없으니까, 내가 내 음악을 과소평가 하다보니 관객들 의 야유를 받고 싶다. 그것이 나의 즐거움이다. 그런 식으로라도 반응을 느끼고 싶다. 자취하고 있어서 양파는 먹으려고 가져왔 다. 반찬으로 몇 달 동안 먹었다.


데일리: 프린지의 매력이 있다면.


증폭기: 날 것의 기분이 있다. 파닥 파닥인다. 파닥 파닥인다. 파닥 파닥인다. 저기서 파닥파닥 여기서 파닥파닥. 이런 느낌이 좋다. 이런 느낌을 많이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다. 커지면서 잃는 것들에 대해서도 신경 쓸 필요가 있다.


데일리: 마지막으로 프린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증 폭 기: 프린지 많이 응원해 달라. 나도 응원해 달라. 내 공연할 때 양파, 배추, 이런 거 단단하지 않은 걸로, 이번에도 던져주시 면, 먹을 수 있는 걸로 던져주면 잘 먹겠다. 프린지에서도 나 외에 신기하고 재밌고 푸릇푸릇한 공연 많을 테니 즐기기 바란다.


데 일 리가 감자, 계란을 쪄서 공연할 때 굴리면 어떤가. 라고 질문하자. 그는 자기가 맞는 게 중요하며, 맞을 때 관객과 관계가 형성된 다고 말했다. 그래서 집요한 데일리가 그 관계는 어떤 관계냐고 꼬치꼬치 묻자 그 왈. “ 몸서리쳐지는 관계” 그리고 “ 그 관계 는 비밀이다”

그 의 공연은 스테이지 잔잔에서 오늘과 토요일 9시에 있다. 양파, 배추를 들고,  맞았을 때 아프 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들고 아마추어 증폭기의 공연을 보러 가자. 신나게 그를 맞추면서 그 순간, 그와 내가 무슨 관계인 지. 생각해 보자. 빵귀신이 나와서 그의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음악의 여신이 그의 머리에 앉아 똥을 누기를 응원하며 공연을 즐기 자.


프린지 데일리 한은화(ehonvacation@naver.com) 이동희(missing7282@hanmail.net)

2005년 12월 한겨레신문 인터뷰

원맨밴드 ‘아마추어 증폭기’ 한받씨 찾아 홍대앞에서
[100℃르포] 그 노래가 그 노래…기타도 징징 긁어내릴 뿐 고정관념 벗어던지다


한겨레 김소민 기자



» 원맨밴드 ‘아마추어 증폭기’의 한받씨가 공연을 하고 있다.






‘뭐 하는 사람들인가? 장난하나?’ 이들의 공연은 장난 맞다. 폼 그만 잡고 놀자는 것이다. 장난이 아닌 것도 맞다. 이들에겐 세상에 말 걸기이거나, 이상을 구체화해보는 진지한 과정이기도 하다. 어찌됐건 ‘노래는 이래야 한다’, ‘이럴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이나 기대를 걸다간 허방 딛는다. 당신이 무엇을 기대하건 그 이상이거나 그 이하다. 이 공연에 임하는 관객의 준비물을 굳이 꼽자면 말랑말랑한 뇌와 세상의 질서 밖으로 곁눈질하고픈 산만함 정도다.

지난 10일 밤 9시 서울 홍대 앞 클럽 ‘레이디 피쉬’ 무대 한가운데 원맨밴드 ‘아마추어 증폭기’(본명 한받·31)가 섰다. 너덜너덜한 붉은 스웨터에 체크 무늬 치마를 입고 분홍색 스타킹을 신었다. 단발머리 가발은 눈을 가렸다. 통기타를 맨 그는 마이크를 잡고 기다린다. 관객 30여명은 관심 없이 딴청이다.


장난 맞다…장난 아닌 것도 맞다

‘아마추어 증폭기’의 노래는 2분을 넘지 않는다. 코드 2~3개로 이뤄진다. 그 노래가 그 노래다. 기타도 징징 긁어내릴 뿐이다. 노랫말과 가창 방법만 바뀐다. “치킨은 ‘호식이 두 마리’가 최고야. ‘호식이 두 마리’ 치킨을 먹는다.”(‘디드로, 호식이 두마리 치킨’) “머리에 노란 꽃 꼽고 내게 고백하네, 야 이 개새끼야 나는 니가 참 좋아.”(‘궁중평화단’)… 20분 사이 6~7곡이 지나갔다. 때론 격정적이고 중독성도 있다. 심각하게 해석하자면 포크와 펑크, 넝마주의와 글램룩(가수 보이조지처럼 성별 구별이 모호하도록 화려하게 입는 것)의 산술평균에 백터를 가미해 미적분한 뒤 로그를 씌운 절묘한 결합이지만,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감사합니다.” 끝이다. “푸홧홧”, “우와.”

‘아마추어 증폭기’에 대한 사실들을 구성해보면 이렇다. 대학 전자공학과에 들어갔다가 바로 그만뒀다. 벤처회사에 다녔는데 자신이나 사람들을 속이는 것 같아 중국 상하이로 도망갔다. 동유럽까지 쭉 가려 했는데 가족들이 전화하는 바람에 돌아왔다. 자취방에서 기타 치며 노래하다 감동해 ‘아마추어 증폭기’ 밴드를 결성했다. 홍대 앞 프리마켓 등 야외공연을 한달에 9~12차례 벌인다. 고등학교 때부터 단편영화 23편을 평균 제작비 5만원을 들여 만들어 왔다. 앨범 <극좌표>와 <29살 자위대>를 냈다. 지금은 한국종합예술학교 영화과 조교이고, 직업난에는 기타라고 쓴다.


“알아서들 즐기세요”





‘아마추어 증폭기’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거칠고 폭력적으로 유추해본 그는 이렇다. 공연 때 가발을 써야 마음이 편하도록 수줍어한다. 사람들과 주파수가 맞지 않다고 느낄 때가 많다. 자신을 남인 듯 바라보며 꾸짖고 괴롭힌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다른 생명체를 죽이는 것이라고 믿을 만큼 자괴감이 컸다. 노래는 자기 긍정의 수단이며 세상과의 악수다. “공연을 하면 공간과 관객으로부터 에너지를 받아요. 내 안에 녹슬어 있던 기어들이 막 돌아가죠. 몸도 마음도 변해요. 소통은 일종의 환상이지만 스쳐지나가면서 역동적인 에너지가 나오죠.” ‘아마추어 증폭기’는 기계적이지 않은 느낌이 강하도록 붙인 이름이다. 곡도 단도직입적이고 원초적인 효과를 노려 단순하게 만든다. 물론 기타를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추어 증폭기’의 노래엔 그래도 제목은 있다. 이어 무대에 오른 ‘쭈어쩡 이어 파렌하이트’라는 밴드의 공연은 이마저도 없다. 노랫말이고 멜로디고 온통 즉흥이다. 보컬 유창운(31·한국종합예술학교 애니메이션과)이 종이 쪽지들을 마이크에 붙였다. 노랫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 참고하려는 것이다. ‘아마추어 증폭기’는 이 밴드에서 베이스를 맡았다. “알아서들 즐기세요.”





유병서(24·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이론)가 드럼으로 박자를 넣었다. 기다렸다가 백재중(31·한국종합예술학교 애니메이션과)의 기타가 끼어들어 징징거렸다. 유창운은 시집을 읽다 맥주를 마시고 외마디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4층도 땅에 5층도 땅에 8층도 땅에 당혹스럽네~.” 사실 당혹스러운 건 그가 아니다. 첫 곡이 40분 동안 이어지더니 느닷없이 “끝인데요” 선언이 튀어나온다. “와” 어떤 이는 환호하고 몇몇은 공연장 밖으로 나갔다. 별다를 것 없는 두 번째 곡이 끝난 뒤 한 관객이 ‘앙코르’를 외쳤다가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그래도 밴드는 앙코르에 응했다. “이건 제목을 뭐로 하지?” 보컬 유창운이 묻는데 다른 멤버들은 대답 없이 그냥 연주 시작한다. 연주가 무르익고 신이 난 보컬이 관객을 보며 “다 같이”를 외치는데 도대체 어떻게 다 같이 하란 말인지….

노랫말을 열심히 들으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건 관객 마음인데 미리 말해두자면 헛수고다. 중국어(한자로는 좌정)와 영어에 독일어까지 섞은 이 밴드의 이름 자체가 난센스다. 보컬이 읽는 시집도 그냥 집어든 거다.

그런데 이 밴드, 진지하다. 같이 살면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 이 질문에 답변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보컬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는 기타나 베이스가 뒤로 물러나요. 불협화음도 나오지만 그것도 신나요. 배타적으로 굴지 않고 서로 이야기를 들어줄 거라는 믿음이 있거든요.”(유창운)


다같이? 어떻게 다같이…

이 밴드는 그들에게도 가상공간이다. 현실에선 백재중은 <차세대 과학교과서>의 일러스트를 그린다. ‘하이킥’이란 ‘정식’ 밴드의 멤버이기도 하다. 유창운은 <두부>라는 만화책을 냈다. 30개 나라를 여행한 유병서는 ‘리얼심볼릭 이미지’라는 이름으로 디제이 활동을 한다.

‘…파렌하이트’는 강자나 보편적인 질서가 나머지 목소리를 잡아먹는 현실에서 붕붕 떠있는 밴드다. 같이 뜨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우리 음악이 불친절하고 폭력적이죠? 그러면 그냥 화를 내세요. 그 자체가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니까요.”


글·사진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87566.html

2005년 4월 10일 경향신문 인터뷰

[피플]“의미없음 어때, 맘이 통하는데”
[경향신문 2005-04-10 16:06]    

아마추어 증폭기(amature amplifier). 이름부터 범상찮다. 아마추어 예술가들의 해방구인 서울 홍대앞 프리마켓을 대표하는 뮤지션이다. 홍대앞 거리와 클럽에서 음유시인처럼 읊조리는 그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복장도 심상찮다. 얼굴 절반을 덮는 헝클어진 가발, 색색의 화려한 남방과 잠옷 같은 가디건, 반바지에 스타킹과 운동화까지. 부조화의 극치다.

노래말과 멜로디도 간단치 않다. 단순한 선율의 반복과 철학적 가사의 읊조림은 쉽게 질릴 것 같으면서도 묘한 매력을 뿜어낸다. 자칫하면 음악적인 난해함으로 귀결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단순함을 ‘증폭’시켜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이 모든 것이 인디밴드 공연을 위한 의도적 설정으로 귀결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아마추어 증폭기’로 활동하는 한받씨(31)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냥’ 하는 거다. ‘의미없음’이 서로 공명을 일으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대 구의 한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지만 곧바로 전공 선택을 후회했다. 진정 하고 싶었던 것은 영화제작과 음악. 1996년부터 기타 를 치면서 음악을 준비했다. 영화과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여건상 포기하고 혼자 제작해 지금까지 20여편의 독립영화를 만들었다.

길거리 공연의 모티브를 얻은 건 2000년. 당시 벤처회사에 취직을 해 환경관련 영화제작을 담당했는데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중국으로 도피했다.

기타 하나 달랑 메고 도착한 상하이. 그는 인민광장 한가운데서 ‘한국말’로 공연을 시작했다. “주로 새벽에 공연을 했는데 노숙자와 가출소년들이 모여들더군요. 제 노래를 듣고 일부는 울먹이기까지 했어요.”

상하이와 광저우, 홍콩 등지에서 성공적인 중국 투어공연를 마치고 한달 만에 귀국했다. 말이 안 통해도 음악으로 공감할 수 있음을 깨닫고 길거리 공연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2001 년 자취방에서 기타를 치다 자신의 노래에 감격해 운 뒤 1인밴드 ‘아마추어 증폭기’를 결성했다. “‘아마추어 증폭기’란 이름은 바 로 생각나 지은 거예요. amtuer와 달리 amature는 그야말로 순수한 ‘아마추어’들이 만든 포르노그라피란 의미를 담고 있 죠. 역시 별 의미는 없어요. 재밌잖아요. 흐흐흐.”

자신의 영화와 노래를 ‘마이너속의 비주류속의 마이너’로 규정하 는 그는 조만간 영화작품 회고전을 열 계획이다. 그동안 23편 제작했는데 평균 제작비는 5만원 정도. 수상하거나 대중에게 알려 진 작품은 물론 아직 없다. 음악을 시작한 것도 영화음악을 직접 만들기 위해서랄 정도로 영화에 애정이 많은 그는 조만간 ‘작 품’ 하나 제대로 만들 계획이다.

“가수로서의 개인적인 바람은 김광석의 라이브 공연횟수 1,000회를 뛰어넘는 거예요. 현재 150회 정도 했는데 수년 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거 같네요. 그 이후엔 영화 제작에만 몰두해야죠.”


이번주에도 홍대 근처에 가 보면 ‘의미없음’을 모티브로 음악을 읊조리는 그를 만날 수 있다.

참, 그는 아버지가 지어준 ‘한받’이란 이름의 의미를 아직까지 모른다. ㅋㅋㅋ.

〈글 김준일기자 anti@kyunghyang.com 〉

〈사진 김영민기자 viol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