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일 월요일

2009년 매일경제 인터뷰

[인디가추천하는인디음악③]아마츄어증폭기 "적나라함에서 느끼는 쾌감"

세 번째 릴레이 기사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앞서 인터뷰한 두 밴드의 리더들이 입을 모아 추천했다. '아마츄어증폭기'는 ‘한받’이라는 한 사람이 클래식 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원맨밴드다. 캐비넷 싱얼롱즈의 김목인은 그를 "자유자재로 노래를 담을 수 있는 뮤지션"이라 표현했고,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조웅은 "이 사람이야말로 인디뮤지션"이라 말했다. 가치가 있는 음악을 지켜내야 한다는 조웅은 지역적 아름다움(Oringin)을 느낄 수 있는 이 밴드의 음악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단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열혈청년은 20대 후반 겪은 절망의 시기를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혼자인 밤 포르노를 보며 느낀 고독을 알고 있는 누군가라면 아마츄어 증폭기의 나른한 노래가 그 씁쓸함을 달래줄 지 모른다.

그의 첫인상에 대한 느낌은 나긋나긋한 아마츄어 증폭기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와 비슷했다. 공연할 땐 형형색색의 가발과 진한 분장을 한 채 격한 퍼포먼스를 즐긴다는 것이 놀라울 만큼 어리숙하고 순박한 표정의 그였다.

2002년 첫 앨범 '29세의 자위대'로 인디씬에 데뷔한 그는 2집 앨범 '극좌표'(2004), 3집 '소년중앙'(2006)을 발매했고 올해 안으로 4집 앨범을 낼 계획이다. 3집 앨범 소년중앙은 손수 2백장을 찍어 팔고 품절시켜버렸다. '더 이상 판매할 필요가 없다'는 게 단순한 이유였다.


▶두 명이나 본인을 추천했다. 기분은 어떤가?

두 분다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이다. 영광이다.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조웅이 소년중앙 앨범에 담긴 '전입미답의 경지를 크레이지' 라는 곡을 추천했다. 가사가 좋다고 하더라.

최근에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가 그걸 카피해서 공연했다. 그렇게 좋은 노랜가 싶은데 좋아해주니까 고맙다. 한 여름날 사랑하는 연인 혹은 친구와 뭔가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내용을 대화하는 식으로 풀어본 거다. 사실 (일반적인) 사람들은 가사로 써놔도 그 느낌을 잡아내지 못한다.

▶개인사를 담은 건가?

일부러 담으려고 한 건 아닌데 나한테 각인된 그런 이미지니까. 가사 속에서 그런 것들이 툭 튀어 나올 때가 있다.

▶인터넷에 올리는 글을 보면 시처럼 글을 쓰더라.

평소에 메모를 많이 한다. 어릴 때부터 그게 습관처럼 되어 있어서. 그때 그때 생각나는 재미있는 아이디어나, 나름대로 시라고 생각하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툭툭 생각나면 적는다.

▶인터넷에 올라온 프로필에는 기타에 삐에르라고 적혀있던데, 객원 멤버인가?

(웃음)기타 이름이 삐에르다. 기타가 몇 있었는데 가장 최근의 기타가 삐에르다.

▶하하! 착각했다. 음악은 어떻게 하게 됐나?

영화음악을 만들려고 시작하게 됐다. 단편영화를 찍었는데 영화음악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기타를 배웠고 기타 배우자 마자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마츄어증폭기는 무슨 뜻인가?

아마츄어(amature)는 포르노 하위장르다. 한 때 아마츄어 동영상을 많이 봤다. 또 전공이 전자공학이다. 거기서 주요 학문 중 하나가 증폭기를 다루는 학문이 있다. 어느 순간 툭 하고 조합이 됐다. 아마츄어 증폭기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좋았다. 아마츄어 라는 포르노 장르는 길거리에서 서로 일면식도 없는 여자분을 바로 섭외해서 그 사람을 대상으로 포르노를 찍는 것이다. 그런 날 것. 날로 된 것에 뭔가 담겨 있지 않나. 날로 된 것 안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느낌이다.

▶가사에 쉽게 접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다. 포르노관련 내용도 들어가 있고.

하드코어한 것들 있다. 내가 추구하는 것 중 하나는 적나라해지는 것이다. 적나라해짐으로써 쾌감을 얻는다. 그런 것을 추구한다. 거리낌없이 가사를 쓰는 부분이 있다.

▶처음 노래로 먼저 접했을 땐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웠다. 그런데 사진을 찾아보고 분장한 모습에 충격받았다. 극적 효과를 노리는 건가?

(웃음). 맨 처음에는 거부감도 있다. 그런데 멜로디가 단순 반복이라 자꾸 들으면 익숙해진다.

▶요즘 대세라는 후크송인가?

후크송이라고 볼 수 있다. 중독돼서 좋아하는 분들도 있고. 대부분 공연 의상도 그렇고 퍼포먼스도 그렇고 과격하고 이상하기도 해서 처음엔 거부감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세상이 그렇지 않은가? 부드럽고 온화할 것이라 생각하고 세계에 나오면 사실 세계는 하드코어한 존재니까.






▶영화인으로선 어땠나?

단편영화를 찍었다. 대구에서 활동하던 독립영화인이었다. 20대는 거의 영화와 함께 했다. 20대 초·중반 가장 왕성한 나이에 영화를 만들면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20후반에 절망의 시기를 겪었다. 그리고 30대에 아마츄어증폭기로 활동했다. (내가 만든) 단편영화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않은 실험적인 영화다. 감정은 분명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담긴 비내러티브 영화'.

▶영화에서 추구했던 것들이 음악적 성향과도 연결되나?

연결이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 다른 솔로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어떤 이는 아마츄어증폭기 노래나 그런 솔로프로젝트의 노래를 들으면서 ‘상당히 시각적이다’, ‘영화같다’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영화를 보고 싶다.

동영상 커뮤니티 유튜브에 짤막한 단편들을 올려놓은 것이 있다. 잠깐 만나볼 수는 있다. 비믈라(BMLA)라고, 약자를 많이 썼다. 비믈라는 나이가 많이 들어 20대 후반에 만든 디지털 단편영화다. 그 때는 비디오로 많이 찍었다. 하이파이나 8mm 비디오로 많이 했는데 그때 영화들은 지금 보기는 힘들다. 개인적으로 보관은 하고 있다.

▶그 영화에도 본인이 만든 음악을 사용했나?

내가 만든 음악을 쓰기도 하고 다른 음악을 쓰기도 했다.

▶왜 하필 기타를 사용했나? 다른 악기도 많았을텐데.

그 때 옆에 기타가 있었다. 기타로 영화음악을 하기가 쉽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꿈이 영화감독이었다. 영화감독으로서 포부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 자기가 만든 영화가 뛰어나지 못하다는 평가를 듣고, 실망하고 절망하게 됐다. 그래서 20대 중반에 접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개인사적인 사건들을 겪으면서 나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를 보냈다. 그 때 내 옆에 기타가 있었고, 기타로 노래를 치면서 부르는데 나를 많이 위로해줬다. 그러면서 노래도 그 시절 많이 만들어지고. 내 자신을 위로하면서 만든 노래들이 아마츄어 증폭기의 초창기 노래들이다.

▶최근의 활동은 어떤가?

요새는 아마츄어증폭기 공연은 안하고 4집 앨범 거의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다. 또 다른 프로젝트를 많이 한다. 펑크 밴드에서 베이스치고 있기도 하고, 또 다른 솔로 프로젝트를 하는데 댄스음악 프로젝트다. 그리고 아마츄어 증폭기보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음악 프로젝트. 이렇게 세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공연도 하고 있고. 요즘은 주로 내가 공연을 기획해서 쌈지나 살롱 바다비 이런 데서 공연한다. 이제 오래 하니까 거의 아티스트로 대접을 해서 가끔은 갤러리에 초청돼서 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할 때도 있다.

▶어떤 무대가 제일 편한가?

그냥 클럽에서 하는 게 편하긴 편하다. 단점은 음악 매니아들이 요즘은 많이 없다. 보러 오는 관객이 별로 없다.

▶관객이 없다니? 요즘 인디음악 듣는 사람이 늘지 않았나?

취향에 따라 구분이 돼서 요즘은 펑크 음악을 하면 관객이 거의 없다. 모던록에 관객들이 주로 몰린다. 취향에 따라서 많고 적은 게 뚜렷해졌다. 그런 부분들을 느낄 때 많이 힘들다. 갤러리나 이런 곳에서 공연하면 부담이 된다. 주목 받게 되고, 특히 클럽보다 장비들이 좋지 못하다. 그래서 기술적인 측면에서 제대로 된 공연을 하기 힘들다. 길거리 공연은 워낙 즉흥적인 요소가 많아서 좋을 때는 정말 많은 감흥을 주지만 안 좋을 때는 완전히 실패하는 공연이 된다. 하지만 가장 짜릿한 순간을 주기도 한다.

▶기억나는 공연이 있다면?

뭐, 하도 많이 해서 거의 몇 개가 있는데 하나는 외국에서 한 거. 일본 히로시마 에서 길거리 공연. 히로시마는 시내가 전부 아케이드로 돼있다. 그 아케이드에 밤이 되면 길거리 뮤지션들이 공연한다. 길을 걷다가 부탁해서 기타치고 노래한 적 있다. 최근 대만에 가서 대만의 클럽에서 음원을 주면서 한 번 공연 좀 하게 해달라고 했다. 엄청 떼를 써서 공연을 했지. 뭐랄까, 가장 뭉클했던 공연은 프린지페스티벌에서 공연했을 때다. 광장 같은 곳에 있는 무대에서 비를 맞으면서 한 시간 동안 공연을 했다. 그 때 관객 중 한 명이 우산을 받쳐주기도 했다. 내 노래 중 비를 테마로 한 노래가 많은 데, 비를 맞고 땀과 눈물이 뒤범벅된 채 비를 테마로 한 노래를 불렀다. 가장 뭉클했다.

▶공연하는 게 재미있을 것 같다.

재밌지. 엄청. 뭔가 정해진 게 없다. 우연적인 요소가 많아서 어떤 사건이 생길 지도 모르고, 기대를 많이 하게 한다.

때로는 배추를 던져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관객들한테 마늘이나 야채 같은 것, 맞아도 안 아픈 걸 던져달라고 한다. 왜냐하면 내 음악이 형편없다는 것을 표현해달라는 의미다. 실제로 야채 가져와서 던지고. 그거 가져와서 요리 해먹기도 하고.

▶와하하! 그 걸로 요리를 해먹다니.

이런 경우도 있었다. 한 팬이 일부러 야채를 던져줬는데 그거 안 가져 갔다고 실망하기도 했다.

▶맞으면 기분 나쁘지 않나?

그걸 즐기는 거다.

▶본인의 음악이 정말 형편없는 음악이라고 생각하나?

왔다 갔다 한다. 진짜 형편없는 음악이라고 느낄 때도 있고 어쩔 때는 이 나라에서 최고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특정한 곡에 대해 그렇게 느끼는 건가?

아마츄어증폭기라는 존재와 그가 하는 공연, 그리고 노래들에서 총체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럼 어느 때 자신의 음악이 형편없다고 느끼나? 또 최고라고 느끼는 곡이 있다면?

뭐라고 해야 되나. 내 음악 특징이 코드가 거의 비슷한 노래가 많다. 코드는 비슷한데 가사가 달라서 다른 느낌이 드는 거다. 그런 부분이 있을 때는 '이거 참 너무 형편 없구나, 이거 뭐 코드는 똑같은데 가사만 바꿔서 재탕 삼탕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고. '금자탑' 같은 경우는 '극좌표' 앨범의 첫 번째 노랜데 내가 녹음하고 내가 빠져들었다. 녹음하고 나서 들으니 너무 좋았다. 정말 빠져 들었다. 그리고 '황홀경'은 같은 앨범 제일 마지막 노랜데 녹음하고 나서는 '이거 정말 대단한 노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이렇게 진실함이 담겨있는 노래인 것 같았다. 그 두 곡이 좋았던 것 같다.

▶'진실함'이란 무엇을 말하는 건가?

그 당시에 살짝 녹음하는 기간에 살짝 (컨디션이) 다운돼 있었다. 그 때 뭔가 자각이 들더라. 가사에 허약한 이상주의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허약하다는 건 예전부터 느꼈다. ‘나’라는 존재는 허약한 가계(家系)에서 태어난 허약한 사람. 허약한 사람이 계속해서 태어난 가문에 내가 최종 끝단에 있다는 생각을 20대 초·중반부터 했다. (내가) 이상주의자라는 건 몰랐다. 어느 순간 그게 생각이 났나 보다. 허약한 이상주의자라는 것이 가사에 쓰였고 그 깨달음까지의 과정이 가사에 담겨 있어서 진실하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첫 공연은 어땠나?

공식적인 공연은 홍대의 클럽 '빵'에서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서 2003년 4월 20일 처음 공연을 시작했다. 거의 6년 지났네. 참 많이 지났다. 아마츄어증폭기는 이제 노장, 원로 대접을 받기 시작한다(웃음). 새로운 뮤지션이 많아서 이제는 클럽 빵에서 공연도 안하고.

대구에서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그는 홍대 클럽 '빵'의 오디션을 통과하고 2003년 4월 20일 처음 공연을 시작했다. 그와 인터뷰를 한 23일은 만으로 데뷔 6년 가까이 되는 날이었다. 그는 클럽에서 신인 뮤지션들의 공연을 뒤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 이젠 노장대접을 받는다며 겸연쩍어 했다. 그런 그가 은퇴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게된 것은 무척 갑작스러웠다.






▶은퇴하게 된 이유?

일차적으로 결혼을 하게 됐다. 아마츄어증폭기의 중요한 모티프는 외로운 남성의 감정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게 되면서 그 감정이 증발해버린 것이다. 주요 모티프가 없어져서 아마츄어증폭기 존재 가치가 사라졌다. 두 번째 이유는 아버지가 돌아 가신 것이다. 아마츄어증폭기의 노래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 반항심도 작용했다. 아마츄어증폭기가 아버지에 대한 어떤 적대자로서 기능하다가 아버지가 사라지면서 그 기능도 없어졌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음악가라는 것은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팬, 청취자도 있고 지켜보는 사람들 많이 있었는데 그걸 간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앨범을 준비하는 것이다. 아마츄어증폭기를 기억하는 팬들에 대한 하나의 선물로.

▶모두 새로 작곡한 것들인가?

아니다. 새 곡도 들어있는데, 공연은 했으나 음원으로 남겨져 있지 않던 곡들을 담고 있다.

▶아쉬워하는 팬들이 많은가?

팬들이 좀 있더라. 팬이 많지 않지만 극소수 열렬 팬들이 많이 아쉬워했다.

▶작업은 주로 어디서 하나?

집에서 한다. 아이 맥으로 녹음하고 있다. 맨처음에는 PC를 썼는데 직장에서 맥을 접하면서 바꿨다.

▶직장은 언제부터 다녔나?

2003년 대학 졸업하고 대구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음악은 별로 생각 안했다. 일자리 구한다고 했는데 이력서를 몇 백 통 써도 면접도 없고. 그래서 취직하려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올라온 김에 아마츄어증폭기 노래 한번 해볼까 생각이 들어서 오디션을 봤다. 공연 시작한 시점이랑 취직한 시점이 거의 비슷하다.

▶일하면서 공연하는 것이 힘들진 않나?

비정규직이고, 힘든 일이 아니라서 공연하기는 괜찮았다.

▶수익은 어느 정도 돼나?

공연수익은 별로 없다. 가끔 축제나 갤러리에서 하면 거마비 정도 받는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받아본 건 70만원 정도. 그게 가장 많이 받았을 때고 보통은 5만원정도. 10만원 받을 때도 20만원 받을 때도 있다.

클럽공연은 거의 (수익이) 없다. 클럽은 수익구조가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그래서 문제점이긴 한데, 클럽 공연해서 돈 받아 본적은 손에 꼽을 정도. 아마츄어증폭기로 350회 정도 공연했는데 클럽공연에서 공연비 받아본 걸 손에 꼽으면 말 다했지.

▶인디음악의 시스템구조에 문제점이 많은 것 같다.

시스템이나 돌아가는 구조가 사실 많이 열악하다. 그래서 최근 장기하씨가 뜨고 했지만 장기하와 얼굴들이 뜬다고 발전한다는 보장이 없다. 그런 부분에서 클럽이나 뮤지션이나 이런 분들이 각성을 하고, 노력해야 하는데 클럽은 클럽 나름대로 관성으로 가고 있고 뮤지션들도 클럽에 이끌려 가는 편이다. 앞으로도 계속 암울하다.

▶인디음악의 미래가 긍정적이지 않다는 얘긴가?

긍정적으로 안 본다. 많이 어둡다. 개인적으로는 뮤지션들 모아서 얘기하려고 하는데 클럽에서는 소통을 안 하려고 하니까. 물론 몇몇 클럽은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 대부분 클럽은 전혀 관심 없다는 식이니까. 전체 신을 생각한다기 보다 클럽만 잘되면 된다는 식이다.

▶개인적으로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게 있나?

본보기를 마련해보자는 의미로 음악가들 모아서 우리가 클럽을 운영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의 관성적인 클럽과 차별화 해야 하지 않은가?

그 부분은 계속 논의를 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뮤지션들에 대해 공연한 것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클럽의 지원이 그렇게 약한가?

클럽과 뮤지션들이 동등한 위치가 아닌 것들이 있다. 90년대 중반 처음 인디씬이 태어났을 떈 분위기가 달랐다. 즐기자는 분위기고 공연 수익에 신경 안 썼는데 지금은 사회자체가 상당히 실용성에 중심을 두는 그런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으로 음악가들은 공연하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식으로 이끌면 안된다. 대화에도 적극적이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아쉽다. 내가 6년 동안 활동하면서 깨달은 거다. 처음에는 몰랐다.

▶대부분 뮤지션들은 그런 것에 대해 생각 안하고 있지 않나?

생각 못하는 수도 있고, 처음엔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니면 그냥 귀찮아서 생각 안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음악만 하면 된다는 경우도 있다. 또 좋은 음악하면 뜨지 않느냐 하는 식으로. 그것도 어떻게 보면 개인적인 태도다.

▶인디밴드(Independent Band)라는 게 사실 그런 의미 아닌가? 자본과 독립적으로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하는 뮤지션들?

그게 말장난이다. 자본과 독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도 하나의 트렌드고 장르라고 본다. 자본과 독립한다는 그러한 운동적인 성격은 말장난이다. 미디어나 평론가들이 자기들의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90년대 중반 그런 용어를 만들어냈다. 그들이 현재의 인디를 설명할 적확한 개념을 형성을 못했기 때문에 90년대 중반 생긴 개념을 쓰는 거다. 지금 현재 인디씬은 그런 독립의 의미가 전혀 아니다.

▶그렇다면 본인이 생각하는 인디밴드에 대한 실질적 개념은 뭔가?

인디에서 많이 벗어났다. 그러니까 많은 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경계가 모호해졌다. 장기하 같은 경우 많은 대중매체나 자본 쪽으로 많이 들어가있다. 기존의 인디라는 개념 자본으로부터 독립돼서 자의식이 강한 아티스트, 반자본주의 운동적 성격이 강했다면 지금은 희석됐다고 볼 수 있다. 음악스타일로서 진솔한 가사. 전혀 꾸밈없는 그런 음악. 그리고 또 88만원 세대 용어가 뜨면서 그들의 감성에 맞는 그런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인디씬을 적확히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인디’라는 것이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인디는 아닌거지.

▶인디 뮤지션들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어두운 면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인디씬이 발전이 안된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잠정적 결론은 무모든 구성원들이 게을렀다는 것이다. 평론가를 예로 들면, 인디라는 개념만 계속 밀고 갔지, 현재 이 시점에 부합되는 개념을 발명, 발견해내지 못한 ‘혐의’가 있다. 음악가들은 자기들 공연, 앨범에 대한 유통 개발에 부지런함 없이 특정 레이블에 들어간다든지 공연에서도 클럽의 일정에만 따라간다든지. 자기들끼리 공연을 기획하지 하지 않고 클럽의 일정에만 따라간 것이 문제였다.

그 다음, 클럽은 공연 레퍼토리가 90년대 중반이래로 전혀 변하지 않다. 형식상으로 변하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일정을 잡고. 클럽이 제일 발전하지 않았다. 수익배분에 있어서도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운영에 급급해서 홍대 상권이 발전하면서 임대료가 높아진 문제가 있지만 거기에 맞게끔 참신한 기획을 한다든지 했어야 했다. 그런 게으름.

관객들의 혐의는 제일 가볍게 볼 수 있는데, MP3에 대한 무자비한 유통-무상유통에 대한 부분도 있고, 공연을 보러 오지 않고. 다운받아 듣기만 한 것도 있겠지.

▶개인적으로 서고 싶은 무대가 있나?

개인적인 추억의 장소인 하동 섬진강 모래사장에서 공연하고 싶다. 어떤 절망의 시기를 보내다가 서서히 수면위로 올라오던 시점에 하동에서 몇 개월 정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다. 그때 전라도도 처음 가보고. 전라도에 대한 환상이 있었는데 너무 좋더라.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 섬진강이 있는데 바다 같고 너무 좋았다. 그 때 하동이 벚꽃이 유명했다. 자취집 창문으로 벚꽃잎이 떨어지던 것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 때가 20대 후반이었으니까 내 젊음의 한 시대가 사라지는 시점에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거기서 보냈다.

▶유학은 왜 가려고 하나?

원래 꿈인 영화감독의 꿈을 더 늦기 전에 이뤄보고 싶다. 그래서 가게 됐다. 큰 결심을 했다. 부인이랑 같이 간다. 영화 관련해서 공부를 하게 될 거다. 감독 데뷔가 언제가 될 지 모르겠지만.

▶영화든, 음악이든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먼저 뭔가를 말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고, 내 노래나 음악이나 영화를 보면서 막연하게 어떤 감정이 느껴졌으면 좋겠다. 거기서 내가 느꼈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됐으면 좋겠다.

▶시나리오 생각해 둔 것이 있나?

시나리오는 간단하게 많이 써뒀다. 그 중 하나는 울산 노동자가 채팅하다가 아오이유우를 닮은 여자를 만나러 서울로 왔는데 못보고 간다는 얘기다.

▶와하하(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재미있는 시나리오다! 본인 얘긴가?

내가 그렇게 찌질 하진 않다(웃음).

▶아오이유우를 평소에 좋아하나?

친구랑 주변사람들이 엄청 좋아하더라. 노동자가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인터뷰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프랑스 유학을 가더라도 한국에서의 음악씬에서 가졌던 그 경험들과 팬과의 소통들, 그리고 감동들 그것들이 내 안에 있으니까 프랑스에 가서도 음악활동이나 공연활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츄어증폭기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니까 (팬들에게) 너무 실망하지 말고 힘내시라고 전하고 싶다.

▶꿈이 있다면?

꿈은 이루어졌다. 영화감독 꿈을 키우면서 소박했지만 나름대로 진실했던 꿈은 내 영화를 봤을 때 한 명이라도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내 영화를 최고의 영화·감동적인 영화로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마츄어 증폭기의 노래를 듣고 분명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 언제까지나 빛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소박한 꿈이 이뤄진 것 같다.

프랑스 가면 뭔가 새로운 꿈을 찾아서 할 수 있겠지. 참고로 며칠 전에 ‘레볼루셔너리 로드’라는 영화를 봤다. 프랑스 파리로 꿈을 찾아서 가려다가 안가고 끝내는 아내가 죽는 슬픈 내용인데 아내와 둘이 봤다. 보면서 ‘우리 내용 이잖아’하고 생각했는데 우린 꼭 갈 거다.

▶이 기획 기사는 추천릴레이라 다른 사람 음악을 추천해야 한다.

웃긴 얘기지만 나는 내 음악이 너무 좋아서 평소에도 내 음악만 듣는다. 개인적으로 아마츄어증폭기의 열렬한 팬이다. 한국에서는 ‘강병철과 삼태기’ 이후로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 분들을 존경하고 좋아한다.

▶그럼 본인의 음악 중 하나를 추천해달라.

뭉클한 노래가 하나 있다. ‘남보원’이라고 소년중앙에 실린 노래다. 50년대 전쟁을 겪으신 윗 세대 분들의 어려웠던 모습이 떠오르는 노래다. 나는 (전혀 그 시절을) 겪진 않았지만.

▶음원사이트엔 없는데, 어떻게 들어볼 수 있나?

남보원을 누가 인터넷에 올려놨던데. 아는 사람이라서 용인하고 있다. 검색하면 나올 것.

▶아마츄어 증폭기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프랑스어로 해달라.

댄스 프로젝트 음악 중 포함된 곡이다. 세상에서 당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뜻이다. ‘쥬뗌므 르 쁠리스 어몽 드’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김보람 인턴기자]




출처 : 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9&no=249940

댓글 1개:

  1. 인터뷰는 인터뷰일뿐, 한받씨는 계속 가십시오.

    u god it my word(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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